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4차 십자군 원정 (문단 편집) === 막간 === 아들덕에 제위를 되찾은 [[이사키오스 2세]]는 곧 난관에 봉착했다. 멍청한 아들이 다른 사람 손에 놀아나는 줄도 모르고 감당치 못할 빚을 진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십자군 - 베네치아 연합군이 아들의 요구를 들어 자신을 복위시켰으니 대가를 치러야 했는데, 어느 것 하나 들어주기 어려웠다. 아무리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십자군이 옹립한 황제와 그 정부는 고작 수도와 인근 지역만을 장악하고 있는 괴뢰 정부에 불과했으며 적법한 황제인 알렉시오스 3세가 수도 밖에서 반격을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군사력 파견은 불가능했고 교회 통합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그나마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해 보였고 연합군 측도 가장 원했던 조건인 은 20만 마르크[* 당시 제국 최고액화 히피르피론(Hyperpyron) 200만 닢에 육박하는 거액이었다.]를 지불하려고 창고를 열어 재정 상태를 확인해 보니 아뿔싸, '''돈이 없었다.''' 동지중해를 호령했던 [[마누일 1세]] 시절 같았으면 무제한으로 비유될 자금력과 마르지 않는 재정이 실재했겠으나, 이사키오스 스스로가 말아먹고 형이 비축금을 가지고 떠난 뒤였다. 자신도 빚쟁이였던 연합군 측은 체납에 짜증나서 닥달하였고, 이에 못 이긴 황제는 결국 세금을 추가로 물리고 황실의 보물과 성물을 팔고 교회의 재산을 징발하여 돈을 마련하려 하였다. 돈을 긁어모으자 당연히 시민들에게서 불만이 터져 나왔고, 교회는 재산이 침해되는 와중에 교회 통합에 대한 밀약까지 듣게 되어 분개했다. 게다가 아들 알렉시오스 4세는 십자군에 의해서 황제가 된 만큼 십자군이 물러나면 반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십자군의 주둔을 허용하고 그들에게 돈을 추가로 약속하며 자신의 호위까지 맡겼고, 그를 통해 베네치아인이 정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니 귀족과 시민들은 더욱 분노하였다. 그럼에도 돈이 부족했다. 박박 긁어모았음에도 절반인 10만 마르크 정도밖에 못 마련한 것이다. 황제 부자는 일단 모은 10만 마르크를 라틴인들에게 지불하고, [[알렉시오스 4세]]는 상당한 자금과 병력을 가지고 수도 밖에서 저항을 계속하는 [[알렉시오스 3세]]를 잡기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그동안 폭동이 터져서 수도에 거주하던 라틴인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해 버렸다. 이에 분노한 연합군 측은 보복을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의 무슬림 지구를 목표로 공격했지만, 그 과정에서 도시에 거주하던 수많은 무슬림뿐만 아니라 정교회인들까지 연합군에게 학살되거나 약탈당했다. 결국 분노한 시민들이 종교를 가리지 않고 연합하여 민병대로 반격에 나서자 열세에 몰린 연합군은 도망치기 위해 불을 질렀고, 이것이 '''또''' 대화재로 번져 수일간 도시를 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후로도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했고, 시민과 연합군 측의 갈등은 극심해져갔다. [[알렉시오스 4세]]가 겨울에 빈손으로 돌아왔을 때 도시는 대화재와 폭동, 연합군의 약탈로 황폐해져 있었고 황제에 대한 불만은 살의에 이르고 있었다. 아버지와 갈등을 벌이던 알렉시오스 4세는 사태를 해결도 못 하고 공포에 질려 십자군의 호위하에 황궁에만 틀어박혀 그들에게 줄 돈만 모으는 지경이 되었고, 그런 황제 부자에게 크게 실망한 귀족과 시민들은 대립 황제를 선출하기 위한 회의를 열어버렸다. 그 와중에 프로토스파타리오스(Protospatarios)인 황제 신변 책임자 알렉시오스 두카스[* 알렉시오스 3세의 딸인 에브도키아의 연인이었다.]가 시민들과 십자군, 황제 사이를 중계하다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 부자를 구금하는 일이 일어났다. 쿠데타 와중 [[이사키오스 2세]]가 미심쩍은 죽음을 맞았고(1204년 1월 27일 ~ 28일), 대립 황제도 곧 제거되었다. 알렉시오스 두카스는 2월 초에 스스로를 [[알렉시오스 5세]]로 선포하였다. 자신들이 옹립한 황제 부자를 실각시켰기 때문에 연합군(십자군)과 신황제([[알렉시오스 5세]])의 사이는 매우 적대적이었다. [[알렉시오스 5세]]는 곧 군대를 모집하고 성벽을 수리하는 등 전투 준비를 서둘렀고, 이렇게 모은 군대로 연합군을 공격했다. 사태의 급진전에 연합군은 당황했으나 침착하게 대응하여 동로마 군을 역관광시켜 버린다. [[알렉시오스 5세]]는 1204년 2월 8일, 엔리코 단돌로 원수를 만나 협상하였으나 곧 결렬되었고,[* 연합군 측에서 내건 협상 조건이 알렉시오스 4세의 복위와 남은 계약금 절반에 대한 지급이었는데, 알렉시오스 5세는 이를 지킬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잘 될 리가 없었다.] 같은 날 [[알렉시오스 4세]]는 교살되었다. 이에 분기탱천한 연합군 측은 재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짧은 휴식은 그렇게 끝났다. >이븐 알 아시르(Ibn al Athir)가 쓴다. [[알렉시오스 3세|로마(Rum)의 왕]]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 버렸고, 프랑크인(Franj)들은 그들의 [[알렉시오스 4세|젊은 후보자]]를 왕좌에 앉혔다. 그러나 그는 이름 뿐인 권력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결정은 프랑크인들이 내렸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매우 무거운 공물을 부과하였으며 그 지불의 불가능함이 드러나자 모든 금과 보석들, 심지어 십자가와 메시아상의 일부를 이루던 것까지 약탈해 갔다. 그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러자 들고 일어난 로마인들은 젊은 군주를 죽이고 프랑크인들을 도시에서 내쫓았으며 성문에 바리케이드를 세웠다. (아민 말루프(Amin Maalouf), 존 로스차일드(Jon Rothschild)(역), 『The Crusades Through Arab Eyes』, (New York, Schocken Books, 1984년), p.22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